유화(柳花: ?~BC24)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BC58~BC19)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강물의 신인 하백(河伯)이며, 남편은 천제(하늘신)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이다. 유화가 해모수와 인연을 맺어 동명성왕을 낳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신이함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해모수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오룡거)를 타고 시종 백여 명을 거느리고 유화가 사는 곳에 내려왔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 되어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저녁에는 하늘의 궁궐로 돌아갔다. 하백에게는 유화, 훤화, 위화라는 세 딸이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 물결을 헤치고 나와 웅심 못가에서 놀았다. 자태가 곱고 아름다워 해모수가 사냥하다 보고는 눈짓을 보내며 마음에 두었다. 해모수는 그녀들을 유혹하기로 했다. 말채찍으로 한번 땅을 긋자 구리집이 세워졌다. 비단 자리를 눈부시게 깔아놓고 금 술잔에 맛있는 술을 차려 놓았다. 여자들이 스스로 들어와 서로 마시고는 곧 취하였다. 해모수가 갑자기 나가 가로막으니 여자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가 그에게 붙잡혔다.
하백이 크게 노하자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유화와 함께 하백의 궁에 이르렀다. 하백은 천제의 아들이라면 신통하고 이상한 재주가 있을 것이라며 시험하고자 했다. 하백이 잉어로 변하자 해모수는 수달로 변했으며, 하백이 꿩이 되자 해모수는 매가 되었다. 다시 하백이 사슴으로 변하자 해모수는 승냥이로 변해 쫓아갔다. 하백은 진정 천제의 아들이라며 주연을 베풀고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해모수가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웠다. 이에 하백은 그를 취하게 한 뒤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넣어 오룡거에 실어 함께 하늘로 오르게 했다. 그러나 수레가 미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이 깬 해모수는 유화의 황금 비녀로 가죽을 뚫고 나와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하백은 크게 노해 딸을 책망하며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 놓고 노비 두 사람을 주어 우발수(백두산 남쪽의 연못)로 추방했다. 유화는 어부의 그물에 걸렸는데, 입술이 길어 세 번이나 잘라내고야 말을 할 수 있었다. 금와왕은 그녀가 해모수의 왕비인 것을 알고는 별궁에 두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햇빛이 따라다니면서 비쳐 임신을 하게 되고,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리자,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들에 버리니 새가 날개로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도 없어 마침내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아이는 한 달이 되자 말하기 시작했으며, 파리 때문에 편안히 잘 수 없다 했다.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주자 쏘는데 그 활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자 유화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내고 주몽에게 떠나라 했다. 그 전에 유화는 미리 주몽을 위해 준마를 골라주었다. 목마장으로 가서 유화가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몹시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말의 바늘을 뽑고 잘 먹여 천리를 달리는 명마로 만들었다.
주몽은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오이·마리·협보 등 세 사람의 벗과 엄호수(압록강 동북방 소재)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고, 군사들이 추격해오고 있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져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은 “아마도 신모(神母)께서 곡식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곡식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었는데, 주몽이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잊어버리고 오자 유화가 비둘기를 통해 다시 보낸 것이다. 즉 유화는 농경을 관장하던 지모신(地母神)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몽은 비류수 가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BC37)이었다.
이처럼 유화는 주몽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주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냥 기술을 익히게 했으며, 큰 뜻을 품고 떠나는데 필수적이었던 준마를 골라주었다. 또 곡식 종자를 주어 장차 백성을 먹일 수 있게 했다. 즉 유화는 영웅을 낳고 길렀을 뿐 아니라 그가 국가를 세우고 경영할 수 있도록 한 건국의 어머니였다.
동명왕 14년(BC24) 8월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는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 즉 유화를 국가의 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매년 10월 제천행사 때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모셔와 나무로 부인상을 만들어 신좌에 모셔놓고 제사 지냈으니 곧 유화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3일간이나 피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유화가 고구려에서 지모신일 뿐 아니라 건국과 호국의 신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권순형)
< 참고문헌 >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동국이상국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