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숭인(李崇仁)의 어머니 김씨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은 고려말의 학자이며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가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끝까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켜 삼은(三隱)으로 추앙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점이 크다고 하겠다.

이숭인 어머니의 성은 김씨(1328~1381)로 계림 언양 사람이다. 그녀는 충헌왕 때 재상으로서 요나라 금산(金山) 왕자를 격파해 사직에 큰 공이 있었던 위렬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후손이다. 그녀의 아버지 김경덕(金敬德)은 소부시(少府寺) 판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대 유학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12세손인 헌부전서(憲部典書) 최중유(崔仲濡)의 딸이었다.

김씨부인은 충숙왕15년(1328) 섣달 초 이렛날에 태어났는데 여덟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8살에 성산 이씨 원구(元具)에게 시집을 갔다. 시댁은 대대로 성산 고을의 향리였는데, 증조부대부터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집안이었다. 남편 이원구의 증조부는 유명한 학자였던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이었으며, 조부는 평양부윤을 지냈다. 그러나 부친은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집간 이듬해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녀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 것을 볼 때면 늘 탄식하고 부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의 몫까지 합하여 지성으로 시집 어른들께 효도하였다. 시아버지 평양공(平壤公)의 춘추 72, 시어머니 선부인(宣夫人) 73세에 병환이 들어 몇 달 째 누워계셨다. 그녀는 손수 약을 다리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다. 지극한 병구완에도 불구하고 시조부모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크고 작은 염을 전부 자기 손으로 하고 곡을 하다가 여러번 까무라쳐 일가친척과 동네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녀는 숭인(崇仁)과 숭문(崇文)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훌륭히 교육하였다. 자랄 때 숭인이 문에, 숭문이 무에 재능을 보이자 그들의 적성대로 각각 문인과 무인으로 키웠다. 그러면서 늘 타이르기를 “몽가(蒙哥)야, 너는 서생(書生)이니 배움에 힘써 게을리 하지 말아라. 보한(普漢)아, 너는 무인이니 활쏘고 말타는 것을 마땅히 잘해야 한다. 그러나 함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하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몽가와 보한은 숭인과 숭문의 어릴 적 이름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을 단지 입으로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자신이 실천하면서 가르쳤다. 김씨부인은 이른 새벽 닭이 울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단정히 앉아서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과 화엄행원품(華嚴行願品)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매일 몸소 베를 짜고 실을 뽑고 바느질 하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이 늘 불경을 외우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여자의 일이라 할 수 있는 베짜기, 실뽑기, 바느질 등을 열심히 할 때 자식들도 공부에 전심전력할 것이라 믿었던 때문이다.


어머님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아 숭인은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19세 때(공민왕16년,1367)에는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관(學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성균관에는 이색을 우두머리로 하여 정몽주․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김구용(金九容)․김재안(金齋顔) 등이 학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중소지주, 향리의 후예들로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당시 권문세족들의 비리에 비판적이었다. 이들을 소위 신진사대부라 부르는데, 이숭인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성리학을 연구하며 가르쳤다.

공민왕19년(1370) 명에서 과거 시행을 반포하자 이숭인은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예비시험에 응시한 결과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당시 그의 나이가 22세로 명의 과거응시 자격이었던 25세에 미달되어 본과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예의산랑(禮儀散郞)․예문응교(禮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 등 문반의 주요 직책들을 두루 역임하였다.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하던 그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권문세족들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정부에서는 친명반원(親明反元)에서 친원(親元)으로 외교정책을 바꾸었다. 이에 이숭인은 우왕 원년(1375) 정도전․김구용․권근 등 신진사대부들과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되고 경산부에 유배되었다.

우왕3년(1377) 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성균사성(成均司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고 조정에 9개조에 달하는 정치․사회․경제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권문세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토지를 침탈하여 농민이 유리도산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시정책에서 어진 사람을 수령으로 임명하고, 성곽을 수리하여 왜구에 대비하며, 사패전(賜牌田)을 규제하고, 불필요한 정부기구를 축소해야 한다는 등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밀직제학(密直提學), 동지사사(同知司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무렵 어머니 김씨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우왕 7년(1381) 정월에 병이 들어 그 달 28일에 춘추 54세로 졸하였다. 이 때 숭인은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지제교(判典校寺事藝文館提學知製敎)였고, 숭문은 흥위위 대호군(興威衛 大護軍)이었다. 딸 셋도 모두 결혼하였고 사위들 역시 관직에 있었다. 손자도 다섯, 손녀도 셋이나 되었다. 잘 자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주들 앞에서 그녀는 행복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뒤 고려의 정세는 더욱 말기를 향해 치달아갔고, 자식들의 삶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었다. 우왕14년(1388) 권문세족과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인임(李仁任)이 제거되었고,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으로서 유배되었다. 그러나 청렴하고 능력이 있었던 그는 곧 서울로 불러 올려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승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차츰 자신과 노선을 같이 했던 신진사대부 내에서 이상한 기류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준․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단순히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차원이 아니라 왕조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그는 이들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로부터 탄핵을 받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공양왕4년(1392) 이성계파가 마침내 정몽주를 살해하고 새 왕조를 건립하였다. 이숭인은 정몽주 일파라하여 삭탈관직되고 나주로 마지막 유배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거기서 정도전․남은 등이 보낸 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 한창 활동할 나이에 비극적 최후를 마쳐 그의 정치적, 학문적 능력으로 볼 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신진사대부로서 고려의 성리학 발전과 고려말의 정치사에서 큰 역할을 한 정치가 였지만 특히 그의 문장은 동방 제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명과 외교관계를 맺은 뒤 고려에서는 명나라에 보내는 表․箋 등 외교문서를 거의 모두 그에게 짓게 하였다. 당시 명과의 관계로 볼 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과 절실함은 명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글이 매우 정성스럽고 간절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여러 외교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가 명에 보내는 금․은․마․포 등 세공(歲貢)을 면하게 한 것도 이숭인 문장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의 저술들은 중국의 사대부들까지 서로 칭송하며 다투어 읽었고, 읽는 이 마다 탄복치 않는자가 없었다 한다. 심지어 고려말에 그가 살해된 것은 윤소종과 정도전이 그의 문장을 시기해서 죽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모두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를 몸소 보여 아들로 하여금 공부에 진력할 수 있게 만든 어머니의 덕이라 하겠다.

또한 이숭인은 여러번 중국에 사신으로 가 누구나 바라던 진기한 중국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여주었다. 이 역시 “옷은 몸을 따뜻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니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지 말며, 음식은 배고프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진기한 것을 숭상하지 말라”고 가르친 어머니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책을 물리치고 죽음을 택한 것도, 그리고 한석봉이 조선 제일의 명필이 된 것도 모두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김씨부인은 만인의 귀감이 될 충절을 길러낸 어머니로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권순형)

< 참고문헌 >
- 도은집, 선부인행장
- 고려사 권115 열전28 이숭인